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기관정보

국가 유공자와 보훈가족의 영예로운 삶이 유지, 보장되도록 보상금 지급, 교육ㆍ취업ㆍ의료ㆍ대부 등의 보훈정책을 수립하여 지원합니다.

국가보훈처-조직도, 직원검색, 정원, 예산, 홈페이지 등 기본적인 정보 제공
조직도
직원검색
처장 박삼득
차장 이병구
홈페이지 http://www.mpva.go.kr 트위터 페이스북 블로그
주소 세종특별자치시 도움4로 9 / 30113 지도
대표전화 1577-0606
박삼득

박삼득

처장

  • 경력

    2019.8~    국가보훈처 처장
    2017.11    전쟁기념사업회(회장), 전쟁기념관(관장)
    2015.7    육군본부 정책연구위원회(위원장)
    2012.11    국방대학교(총장)
    2011.5    육군본부 개혁실(실장)
    2009.4    제5보병사단(사단장)
    2003.12    제15보병사단 38연대(연대장)

정부서비스

기관소식

  • 2019년 12월의 6·25 전쟁영웅 '전병익 해군 중사' 선정 ‘백두산함 장전수로서, 대한해협 전투를 승리로 이끌다.’ - 2019년 12월의 6·25 전쟁영웅 전병익 해군 중사 - □ 국가보훈처(처장 박삼득)는 ‘전병익 해군 중사’를 2019년 12월의 ‘6?25 전쟁영웅’으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. ○ 전병익 중사는 1929년 6월 충청북도 음성에서 출생하였다. ○ 1947년 7월 해군에 입대하여 1950년 4월 대한민국 해군 최초의 전투함인 PC-701함(백두산)에 배치되었다. ○ 6·25전쟁 발발 직후에 1,000톤급 북한군 무장수송선이 병력 600여명을 태우고 부산 동북방 30마일 해상으로 남하하였다. - 이때 전병익 중사는 대한해협 해전에 ‘3인치 포 장전수’로 참전하여, - 험상궂은 날씨에 시야확보가 어려운 밤이라는 악조건 속에서 치열한 교전 끝에 6월 26일 부산 동남방 해상에서 북한군 무장수송선을 격침하여 승리를 거두었으나, - 안타깝게도 전 중사는 적선에서 발사한 포탄을 맞고 장렬히 전사하였다. ○ 대한해협 해전은 해상교통로 출입항의 중심지역인 부산을 공격하려던 북한의 기도를 무산시키며 6·25전쟁 중 첫 승리를 거둔 전투였으며, - 유엔군은 수많은 병력과 군수물품, 유류 등 전쟁 물자를 부산항으로 수송할 수 있었고, 이는 6·25전쟁을 승리로 이끈 계기가 되었다. □ 한편, 정부에서는 전병익 중사의 공훈을 기려 1952년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.
  • 2019년 12월의 독립운동가 '윤봉길 의사' 선정 ‘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!’ - 2019년 12월의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 - □ 국가보훈처(처장 박삼득)는 광복회,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윤봉길(1908.6.21~ 1932.12.19) 의사를 2019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. ○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서 태어났다. ○ 1927년〔농민독본(農民讀本)〕3권을 저술하여 한글교육 등 문맹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으며, 1928년에는 부흥원(復興院)을, 1929년에는 월진회를 설립하여 농촌계몽운동을 실시하였다. ○ 1930년 3월 의사는 ‘장부출가 생불환(丈夫出家 生不還,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)’이라는 비장한 글을 남긴 채 정든 가족을 뒤로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. ○ 이후, 중국 상해에서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의열투쟁의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던 중 “1932년 4월 29일 일왕(日王)의 생일인 천장절(天長節)을 일본군의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과 합동으로 상해 홍구공원(虹口公園)에서 거행할 예정이다”라는 ‘상해 일일신문‘의 보도를 접하고 의거를 결심하였다. ○ 의거 3일 전 1932년 4월 26일에, 의거가 개인적 차원의 행동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의사를 대변한다는 점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백범 선생이 주도하던 한인애국단(韓人愛國團)에 가입하였다. ○ 의거 당일 1932년 4월 29일 홍구공원에는 수많은 인파가 운집하였고 경계가 삼엄한 가운데, 단상 위에는 시라카와(白川) 대장과 해군 총사령관인 노무라(野村) 중장, 우에다(植田) 중장, 주중공사 시게미쓰(重光),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(河端), 상해총영사 무라이(村井) 등 침략의 원흉들이 도열해 있었다. - 오전 11시 40분경 축하식 중 일본 국가 연주가 거의 끝날 무렵, 의사는 앞사람을 헤치고 나아가 단상 위로 수통형 폭탄을 던졌고, 폭탄은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을 내고 식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. - 이 의거로 시라카와 대장과 가와바타 거류민단장은 사망하고 노무라 중장은 실명, 우에다 중장 등은 중상을 입었다. ○ 그 결과로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, 특히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“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”고 감격해 하며, 임시정부에 대한 중국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이어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. ○ 체포된 의사는 가혹한 고문 끝에 1932년 5월 25일 상해 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며, 이후 일본 오사카로 호송된 뒤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(金澤)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십자가 형틀에 매어 총살, 25세의 젊디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. ○ 의사의 유해는 일제에 의해 버려졌고, 광복 후인 1946년에야 조국에 봉환,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. □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.첨부파일191129 보도자료(12월의 독립운동가, 윤봉길 의사).hwp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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